1948년 제주 4·3 폭동사건 ▣ 진실의 역사▣

박정희가 공산주의자가 되었던 결정적인 영향을 준 그가 가장 존경했던 친형 박상희의 죽음도 이때 였다.

박상희는 원래 인테리겐차 였고 대구폭동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  제주4·3사건이란 

194843일 남로당중앙당과 남로당 전남도당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 제주공산주의자들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고 남한을 북한에 수립된 김일성 공산주의 정권의 통치영역에 포함하기 위하여 일으킨 폭동 반란으로서, 19574 2일 마지막 인민유격대원을 체포하여 사건을 완전히 종결할 때까지 9년간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도민이 무고하게 희생된 사건이다.


1. 194843일 남로당제주도당은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려고 무장 반란을     일으켜 1,756명을 살해했음1)

 2. 19485·10제헌의원 선거 때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유일하게 북제주   2선거구 거를 파탄 내어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했음2) 

3. 19485·10선거 때 선거인 등록율 91.7%, 투표율 95.5%로 국민 절대   다수의 참여와 지로3)1948815일 건국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하여      87개월 17일 간  항적했음.

4. 4·3주동자 김달삼(본명 이승진)은 박헌영 지령에 따라 살인 방화 테러로   지하선거실시하여 52,350명 투표지를 가지고 월북하여 북한권  수립에 앞장섰음4)

5. 194810·19여순반란사건 직후인 1024일 제2대 인민해방군 사령관    이덕구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선전포고하여 항적함5)

6. 김달삼은 19498월 북한 강동정치학원 출신자 300명으로 구성된   3병단을 이끌고

태백산구에 남파되어 민국 전복을 획책했음6)

7. 4·3 주동자 김달삼 안세훈 강규찬 고진희 이정숙 문등용은 월북하여 북한   제1최고회의 대의원이 되어 북한정권 수립에 앞장섰음7) 

8. 6·25전쟁 직후 국운이 백척간두에 처했을 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각 읍․면   별로 인민군지원환영회를 조직 빨치산과 합세, 공세를 강화하고,   북한인민군이 상륙하면 그들과  함께 대한민국 전복을  획책했음8)

9. 4·3주동자 안세훈 강규찬 고진희 조몽구 등은 6·25 때 북한인민군과  함남침하여

한민국에 항적하였음9) 

10. 제주4·3발발의 주체는 남로당이고 남로당은 조선공산당의 후계체이며     남로당강령은 마르크스 · 레닌 사상에 입각한 공산주의체제 국가 건설을     목표,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고 건국 이후에도 계속 항적하였음10)

 11. 남로당제주도당 인민유격대원들은 인공기를 곳곳에 게양하였으며 성     장군 만세를 부르며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하였음11)

 12. 19981123일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 CNN방송의 ‘문답 아시아’ 프로 그램에 출연하여 ‘제주4·3은 공산당의 폭동으로 일어났’다고 전 세계에     천명하였음12)

 13. 남로당제주도당 대정면당 위원장 이운방은 4·3‘주동자는 빨갱이로   봐야지, 최종

목적은 공산주의니까. 그들의 우선 목적은 통일조국 건설이고’라는 증언을 하였음13)

 14. 제주도민전 문화부장으로 19473·1기념투쟁을 진두지휘한 김봉현이    일본으로 도피해서 김민주와 함께 쓴 책에서도 3회나 4·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위한 투쟁이라고 명기했다.14)


1. 우리나라 초기 공산주의의 배경
1919년 거족적인 3·1 독립운동으로 국권 회복을 기대했으나, 오히려 일제의 탄압은 가혹해졌다. 이때 백성들의 마음을 강하게 유혹한 것이 바로 공산주의 사상이었다. 당시는 1917년 11월, 러시아에서 레닌의 주도 하에 일어난 볼셰비키 당에 의한 폭력 혁명이 성공한 이후로서, 전세계적으로 공산화의 물결이 급속히 확산되는 때였다.
공산당은 소비에트 정부의 후원 아래 공산화를 목적으로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이런 배경으로 공산주의는 애국지사들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파급되었고, 이를 선두에서 지휘했던 자가 박헌영이다. 공산당 조직은 3·1 운동이 있은 지 6년 만인 1925년 4월 17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박헌영, 김재봉, 윤병덕, 김약수 등 20여 명이 조선공산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2. 해방 이후 공산주의의 확산
(1) 38선으로 분단된 조국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터뜨리자, 소련은 만주에 있는 일본군을 점령하고 곧이어 한반도를 향해 진격했다. 이에 미국은 38선을 그어, 38선 이북은 소련이 일본의 항복을 받고, 38선 이남은 미국이 항복을 받기로 결정했다.

(2) 박헌영의 등장과 조선인민공화국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공산주의와 자유 민주주의의 갈림길에서 혼란과 무질서에 휩싸였고, 숨어 있던 공산주의자, 해외에서 돌아온 좌익 세력들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45년 8월 17일,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세워졌는데, 이는 당시 가장 큰 정치단체였다. 이후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건국준비위원회를 흡수하여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급조해 창건했다.
하지만 1945년 10월 말부터 있었던 ‘위조지폐사건’은 당시 급속도로 번져가던 조선공산당의 발목을 잡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조선공산당에 의한 위조지폐 발행 사실이 탄로 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박헌영은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38도선 부근의 이북 해주로 월북했고, 남한에 있는 공산당원들과 프락치를 조종하여 대대적인 폭동을 계속 일으켰다. 그 전초전이 바로 1946년 ‘대구 10·1 폭동 사건’이다.


3. 1946년, 대구 10·1 폭동 사건
(1) 대구 10·1폭동 사건의 전개
10·1폭동이 있기 전부터 우리나라 식량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당시에는 미군정이 쌀을 모아 균등하게 배급하는 ‘쌀 배급제’가 실시되었는데, 쌀값의 폭등으로 인해 백성들의 반미 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남로당은 수많은 민중들을 선동하여 반미 시위를 일으키며 박헌영의 위조지폐 사건을 덮으려 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역에 수천명의 노동자가 모여 반미 시위를 벌였다. 경찰 150여 명이 경계만 서고 있는 상태에서 대구역 조선노동조합 대구지역평의회 사무실 2층에서 갑자기 “경찰 저놈들 죽여라”는 고함과 함께 경찰에게 돌을 사정없이 던졌다. 깜짝 놀란 경찰은 2층의 노동자들을 향하여 사격했고, 당시 연탄 공장에서 근무하던 황말용이 경찰의 사격으로 죽었다. 경찰이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대구 전역으로 퍼졌고, 이 일로 좌파 간부들은 10월 2일 노동자들을 총동원하기로 했다.
10월 2일 오전 9시, 대구의과 대학생 네 명의 학생들이 병원에서 콜레라로 죽은 시체 4구에 시트를 덮고, ‘어제 대구역에서 경찰에 의해 죽은 시체’라는 거짓말로 학생들을 선동했고, 오전 10시 반경 대구경찰서에 도착했다. 공산당 도당 책임자 장적우가 경찰이 먼저 무장해제 하면 군중을 해산시키겠다고 대구 경찰서장 이성옥에게 압력을 넣었다. 이 말을 믿은 이성옥 서장은 경찰들에게 무장해제를 명했으나, 시위대들은 경찰서 안으로 진입하여 대구 경찰서를 장악했다.

(2) 경북·경남·전남 지역 등 전국으로 폭동 확산
조선공산당 시위대들은 50~100여 명씩 조를 짜서 탈취한 자동차로 경북 22개 군청과 경찰서로 출발하여 점령했다. 대구 시내는 폭도로 변한 군중이 경찰의 몸을 칼과 도끼로 난자하며 순식간에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다. 대구에서의 10·1폭동을 계기로 조선공산당은 각 지방당부에 ‘호응 투쟁’을 전개하라는 지령을 내려, 폭동은 남한 전역의 73개 시군에 파급되어 갖은 난동과 만행이 저질러졌다.

(3) 대구 10·1 폭동 사건의 결과
대구 10·1폭동 사건으로 경찰 38명, 공무원 163명, 민간인 73명이 사망하였고, 부상 1천명, 776동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대구 10·1폭동은 겨우 진압되었지만, 시위 주동자들은 태백산과 소백산으로 숨어들어 우리나라 빨치산의 시작인 ‘야산대’를 만들었다.
1946년 8월 28일 이북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조선노동당(약칭: 북로당)의 창립대회가 열렸다. 남한에서도 1946년 11월 23일 박헌영을 중심으로 남조선노동당(약칭: 남로당)이 출범했다. 남과 북에 두 개의 공산당이 창당된 것이다. 김일성은 1948년 2월 6일 ‘북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헌법을 채택하고 지폐를 발행하며, 사실상 북한쪽에서 단독 정부를 먼저 수립했다.


1948년, 제주 4·3 폭동 사건
(1) 한반도의 최남단, 제주도의 공산당 조직
제주도는 육지인 목포로부터 141.6km, 부산으로부터는 286.5km 정도 떨어져 있다. 진압이 어렵다는 지리적 특수성으로 해방 직후부터 친북 좌파들의 활동이 극렬히 전개되었다. 해방 이후 제주도에는 1945년 12월 9일 좌익계 인사들만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제주도위원회’가 창립되었고, 1946년 11월 23일에는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당시 제주도 마을 사람 거의가 사상이나 노선도 모르고 남로당에 가입했으며, 헌병대, 정보기관, 경찰관 등을 제외하고는 온통 조선인민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세상이었다. 미군정이 있기는 했으나, 해방 직후에 결성된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1947년의 3·1발포 사건까지 사실상 제주도 전역을 지배한 자치 행정 기구였고, 그 배후에는 남로당이 있었다.

(2) 1947년, 제주 3·1 발포 사건
1947년 3·1절 행사는 친탁과 반탁, 좌와 우의 격돌장이 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많은 충돌이 일어났다. 제주도에는 우익이 약하여 아예 좌익과 다툴 힘이 없었고, 결국 경찰과 대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제주 3·1절 기념 투쟁에 참가한 인원은 25,000명이며, 그중 좌익 단체 소속만 17,000명이었다. 남로당 지지 청년들은 “미군정은 물러가라”, “친일파를 처단하라”등을 외치며 군중을 선동하여 쏟아져 나갔다. 긴박한 상황에서 골목에서 갑자기 뛰어나온 5~6살 난 어린이가 기마경찰관 임영관 경위의 말에 부딪혔고, 좌익 청년들과 사람들이 임영관 경위를 끌어내리려는 소동이 벌어졌다. 미군정의 허락을 받은 경찰이 총을 쏘자 군중은 삽시간에 도주했고, 이 불행한 사태로 타살된 경찰관 한명을 포함해 7명이 죽고 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남로당은 경찰관이 위급한 상황에서 정당방위로 일으킨 순간의 실수와 돌발적인 상황을 부풀렸고, 마치 상부에서 의도적으로 발포 명령을 내린 것처럼 꾸며서, 시민들에게 경찰에 대한 악감정을 갖도록 선동하였다. 결국 제주 남로당은 3월 1일 경찰의 발포 사건을 빌미로 1947년 3월 10일부터 북군청을 제외한 제주도 모든 행정기관, 학교, 회사, 은행, 교통, 통신기관과 민간 기업 등 156개 단체, 41,211명이 참가한 ‘제주도 총파업’에 들어갔다. 미군정에서는 발포 사건의 장본인 이문규 순경을 파면하고, 제주 군정장관, 제주 도지사, 제주 검찰청장, 제주 경찰 감찰청장등에게 책임을 물어 해임함으로써, 1947년 4월 말 제주도 총파업 사건은 수습되었다.

(3) 5·10선거 반대를 위한 2·7 폭동 사건
1948년 2월에,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남한만의 단독 선거일이 1948년 5월 10일로 확정되었다.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려던 박헌영은 합법적인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고, 지령을 내려 2·7 폭동과 4·3 사건을 일으켰다. 1948년 2월 7일, 남로당은 당원 30만 명을 동원하여 전국적으로 전쟁을 방불케 하는 2·7 폭동 사건을 일으켰다. 다리가 폭파되고 운수, 전신, 전화의 파업이 일어났고, 남한의 행정기관들이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서울과 각 지방에서는 ‘민주학생연맹’의 지휘 아래 일부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들어갔고, 농민과 노동자들이 경찰서와 지서를 습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제주도에서도 2월 7일 새벽을 기하여 일제히 도내 경찰을 습격하여 많은 살상과 방화를 하였다. 소위 ‘인민해방군’으로 개편된 이들은 소총과 수류탄, 일본검, 죽창으로 무장하여 경찰관을 생매장하고, 경찰 지서장을 살해하며 폭도화되었다. 2·7 폭동은 약 2주간 지속되었고, 폭도들은 한라산 전역에 전투기지를 구축하고 4·3폭동까지 이어나갔다.


4.3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기 위해 제주도에서 48년 4월 3일 새벽 2시부터 제주도 12개 지서를 일제히 습격하여 경찰, 공무원, 그 가족 등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면서 시작된 무장폭동이었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선량한 제주 시민을 선동하여 북조선 건국선거에 참여하게 하고 대한민국에는 선전포고 및 살상, 방화, 약탈을 자행하며 인공기 게양, ‘김일성 만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며 7년간이나 대한민국에 항적하였다.

무고한 양민의 희생에 대한 원인과 책임은 공산당에 있다.

공산주의 이념에 물든 폭도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이 희생되었던 것은 공산반란군이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양민을 끌어들여 희생을 유도하였기 때문이다. 군경 입장에서는 피아를 구분하기 어려운 불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강경진압을 하였던 것이며, 이로 인한 희생에 대해 군경의 위법성 또는 책임은 인정될 수 없다. 무고한 희생자 없이 무장내란을 진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진압의 결과 2년 후 6.25남침이라는 위기로부터 대한민국을 건졌다는 점에서 진압군의 책임은 면책되고 희생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폭동과 내란의 주범인 남로당에 있다. 정부는 북한군과 남한 좌익들이 12만 8천명의 남한 양민을 학살한 역사부터 진상규명하여 처벌하고 배상을 물어야 한다. 제주4.3이 남로당의 무장폭동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김대중(도요타다이쥬) 대통도 인정하였다.

제주4.3보고서는 4.3사태의 진상규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제주4.3특별법의 제1차적 목적은 진상규명이었다. 그러나 제주4.3보고서를 작성한 자들은 4.3의 진실을 감추었다. 폭동을 봉기로, 폭도를 희생자로 둔갑시키기 위해서 폭도의 만행을 감추었던 것이다. 따라서 4.3보고서는 남로당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해 일으킨 내란이었음을 규정했어야 했다. 그러나 보고서는 공권력에 의한 양민 희생과 희생자 명예회복만을 부각함으로써 4.3사태가 공산폭동반란이었다는 역사적 진실을 은폐 · 왜곡하였다. 1948년 4월 3일 좌익폭도들은 어린아이들까지 살상하고 남한 선거 반대, 북한 선거 지지를 하였고, 1948년 10월 24일은 2대 폭도사령관 이덕구가 대한민국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였는데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들을 빼버렸다. 심지어 폭도들이 군경복장을 하고 마을을 여러 차례 습격, 살인, 방화를 자행하여 이를 군경에게 뒤집어씌웠다. 이런 왜곡의 결과로, 제주4.3 평화기념관에는 남로당의 만행에 대한 전시물은 찾아 볼 수 없고, 이승만 정권이 양민을 학살한 것처럼 전시하고 있다. 공비토벌을 학살로 규정하고, 헌법재판소의 결정도 무시한 채 군경을 죽인 2,500여명의 살인폭도를 희생자로 결정하는 죄악을 범하고 있다.  

폭동이고 반란인 사건은 국가가 보상하고 기념할 사건이 아니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은 국민 화합적 차원에서 필요하다. 4.3사태의 가해자는 공산폭도이며 따라서 4.3사태의 무고한 희생자는 원칙적으로 공산폭도와 그 유족에게 배상을 청구해야 옳다. 국가는 무고한 피해자에 대해서만 보상하는 것이지 폭도까지 보상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해자측이 역사적 진실을 통해 잘못을 인정한다면 국민화합 차원에서 배상책임을 감면받을 수는 있다. 국가가 폭동과 반란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추념하거나 보상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에 대한 부정이 되는 것이므로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 된다.

제주4·3사건 진행과정

 

194843

 제주4·3사건 발발

4개월 12일 간

    무장폭력 건국 방해

1948815

대한민국 건국


 

 

 

 

 

 

87개월 17일 간

 대한민국에 항적 

195742일 마지막 공비 오원권 생포

 제주4·3사건 종결(9)

 

 이때 자유 민주주자이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은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하며, 자유민주주의로 건국을 해야하고 남한만 이라도 자유선거를 통해  정부를 수립  대한민국을 세워야 한다고 순회연설과 국민계몽을 해나갔다. (정읍 발언)

유엔의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였으나 , 북한의 김일성과  남한의 김구와 김규식 등 소수 유명인사들은 반대하였다.  이들 의견을 따랐다면 우리는 민족끼리 공산화 아니면 대한민국은 탄생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남한은 1948년 5.10일 남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건국을 위하여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결국 북한에는 김일성이가 공산주의 괴뢰정권을 만들었고(1946년) 남한에는 이승만에 의하여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건국(1948.8.15) 되어 유엔은 대한민국을 유일한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하였다.

이과정에서 공산당은 남한의 대한민국 건국을 막으려고 1946년 부터 전국적으로 9월총파업, 대구폭동,

제주 4.3폭동, 여순반란 사건 등등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파업과 폭동과 테러를 일으킨다.

(* 에피소드: 이때 전국적인  파업활동 지원자금 공급을 위해 박헌영이 주도한 "정판사 위조지폐 "를 발행하게 된다

이 사건이 발각되자 박헌영은 시체로 위장하여 월북하게 되고 이때부터 김일성에게 주도권을 완전히 빼았기게 되었으며,

 6.25사변시 남한의 남로당 지하조직 "20만 봉기" 설의 책임을 물어 1957년 처형 되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북으로 도주한 박헌영의 사생아는 지금도 남한에 버젓이 생존하여

반정부적인 활동을 계속 하고 있으며 1980년대에는 박원순 현 서울시장과 합하여 xx민족연구소를 설립

전교조와 검인정 교과서의 원천을 제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처형된 위조지폐범  발행책 박종락의 손자(박지원)도 생존해 현재 호남의 거물 정치인으로 맹 활동중에 있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자도 건국에 기여했다는 괴설로 법을 바꾸어 유공자로 대접 받으며 잘 살고있다.

 

제주4.3사건 당시인 1949년 2월 2연대 특공대 장병들이 무장대로 가장했다. 당시 토벌에 나선 군인들이 무장대로 변장해 주민들의 사상을 검열한 사실이 확인됐다. 왼쪽 아래에 ‘폭도로 가장코’라는 설명이 뚜렷하다.

원래 소박한 제주도는 1921일본 유학생이며 일본공산당 에서 활동하던 김영식이라는 자에 의해 제주도공산당을 일찍 부터 결성 하였다.  제주도는 지역의 고립성과 문맹율이 높은 특성으로 80%이상이 공산주의에 쉽게  현혹되었고 남로당조직이 광범위하게 퍼져 영문모르게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비율이 높았다.

이를 경계하는 치안 조직 경찰에 뜻하지 않게 사건이 발생했다

1947년 3.1 절 기념행사에 출동한 제주경찰 기마대의 말의 눈을 누군가 찔러 말이 놀래 근처에 있던 어린애에 부상을 입히게 되었고 경찰의 사과후에도 일련의 군중이 의도적으로  경찰서로 몰려가고 이것을 경찰에 대한 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발포, 6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났다. 이후 제주도 남로당은 5.10 선거반대. 대한민국 건국반대.스탈린 ,김일성, 박헌영 만세를 주장하며 파업과 시위와 테러를 지속적으로 감행했다

 드디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4시 사이에 제주남로당 무장 유격대가 제주도내 경찰서 12곳을 습격하여 경찰과 경찰가족 선거관계자 우익주민 27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다수의 경찰가족을 산으로 납치하였다.

주동자는 대구폭동 에 가담하고 은밀히 잡입한 김달삼이란 자에 의해 주도되었다. 결국 남로당의 공격과 방해로 5.10 선거에서 제주도 3개 투표소중 2개소가 무효투표로 처리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 되었으나 전국적인 공산주의 세력의 파업과 시위와 테러는 계속 자행되어 정부적 차원에서 일종의 특단의 조치가 내려지게 됐다.

* 이승만 대통령의 특단 조치 요약은

1,자유 대한으로 전향하라

2,아니면 재산정리해서 북한으로 가라

3,그렇치 않으면 소탕하겠다,

전국적으로 약 9만명이 재산을 정리해서 북으로 갔고 서울대 교수의 절반인 50%가 북으로 가게 되었다. 생계와 특수 목적의 전향하지 않은 공산사회주의자들은 식량이 풍부한 호남지역의 지리산,  월악산 그리고 소백산, 태백산, 오대산과 제주 한라산 등으로 숨어 들어가 후일 6.25사변시 빨치산의 원천지가 되었다.

제주도 빨치산은 1957년이 되서야 겨우  소탕하게 되었다.

제주도에는 1948년 11월 21일 계엄이 선포되고 조직적인남로당 무장유격대 약 350명의 소탕작전이 시작된다.

상당수의 볼모로 잡힌 주민들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 남로당 유격대는 산위에 있고  산중간에는 민간인이 거주하여 남로당이 산중간에서 보급을 받고 활동함으로 소탕에 어려움이 있고 남로당이 산중 거주 주민으로 위장 활동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심지어 한 집안에서 형은 볼모로 잡힌 빨치산, 동생은 경찰일 정도였다 하니 혼란이 말이 아니었다.

이후 산중간의 민간인 분산 작전이 실시되어 해안가 5km이내로 이주하도록 조치하고 남아있는 민간인은 남로당 폭도로 간주 살육이 자행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과정에서 무고한  많은 민간인들의  희생이 뒤 따랐다.

 기간중 민간인 1만4천여명과 군경 토벌대 1천7백여명이 전사, 사망하였다.

소탕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김달삼을 비롯한 많은 지도자 간부들은 이미 북한으로 몰래 빠져나갔다.

 1949년 6월 제주남로당 총사령관 이덕구가 체포되었고 남로당폭도들의 증언에 의하면 , 몇개월내에 인민공화국을 건설한다고 독려하였다고 한다.

1949년 10월 한반도에서 미군이 철수하자 북한은 다음해 1950년 6.25일에  즉시 기습남침을 단행하였다.

1948년 남한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국한것은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만약 그당시 이승만대통령에 의한 자유민주주의 국가건국이 실패했다면

현재 우리는 조선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 되었을 것이다. 


정의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역사적 배경

광복 직후 제주사회는 6만여 명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 등으로 겹친 악재와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 경찰의 군정 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 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 참가했던 이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1절 발포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을 전개했고,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관 총파업이 이어졌다. 미군정은 이 총파업이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지만,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했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 등을 대거 제주로 파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벌였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서북청년회(이하 ‘서청’)는 테러와 횡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했고,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3월 일선 경찰지서에서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다.

경과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총성과 함께 한라산 중허리의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12개의 경찰지서와 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무장봉기가 발발하자 미군정은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하고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군대에 진압출동 명령을 내렸다.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의 김익렬 중령은 경찰·서청과 도민의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에 군이 개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귀순작전을 추진해 4월 말 무장대측 책임자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대동청년단원이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평화협상은 결렬되고, 제9연대장은 교체되었다.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에 파견하여 5·10 선거를 추진했다.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선거가 실시됐다. 그러나 제주도의 세 개 선거구 가운데 두 개 선거구가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제주도가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 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결국 5·10 선거 후 강도 높은 진압작전이 전개됐다.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 문제를 뛰어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됐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중산간 지대는 초토화의 참상을 겪었다. 11월 중순께부터 이듬 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중산간 지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방화되었고, 마을 자체가 없어져버린 이른 바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게 된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를 병용하는 작전이 전개됐다.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한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19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희생되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결과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1980년대 이후 4·3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각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0년 1월에 「4·3특별법」(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공포되고, 이에 따라 8월 28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보고서(『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이 이루어졌다. 이후 4·3평화공원 등이 조성되었다.

진상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다. 4·3사건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심사를 마무리한 결과(2011. 1. 26 현재), 희생자로 14,032명과 희생자에 대한 유족 31,255명이 결정됐다.

의의와 평가

4·3사건으로 인해 제주지역 공동체는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참혹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4·3특별법 공포 이후 4·3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제주도는 2005년 1월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다.



후일 좌편향 민족사관의학자들에 의해 태생적 원인과 배경을 쏙 빼고 군경에 의한 무차별 주민 학살사건으로 만 편향 왜곡 기록되고 있다. 

좌편향 대통령들은 한결같이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자들 이라는 시각이니 대한민국의 화합이 아직도 멀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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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수로 어여쁜 나이 어린 내 마눌 박보영


♥ 억수로 어여쁜 이뿐

나이어린 내 마

박보영이는 하느님과

동기 동창생이며, 부

님보다는 더 높고, 떠오

눈부신 양과 같

,세발에 쨉도 되

지 않고 ,일개 따까리

입니다.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어도 그것은 억수로 어

여쁜  이나이어린 내 마

눌 박영의 은총입니다.



내 마눌 박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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